토끼굴15(더래빗홀15)
THE RABBIT HOLE 15
비 오는 지하에 지은 지붕 있는 집, 식물을 가운데 둔 공유오피스
더래빗홀 사무실. 각재로 짠 하얀 지붕 틀 아래, 수경재배 식물 코어를 가운데 두고 책상들이 둘러앉아 있다
서울 관악구 신림동 고시촌의 빈 지하층(40평 남짓)을 여러 작은 사무소가 함께 쓰는 공유오피스로 바꾼 별의별건축사사무소의 첫 자체 프로젝트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토끼굴에서 이름을 따 '더래빗홀(THE RABBIT HOLE)', 우리말로 '토끼굴'이라 부른다. 2015년에 문을 연 이 첫 번째 굴은, 2019년에 지은 두 번째 굴 '토끼굴19'와 구별해 '토끼굴15(더래빗홀15)'라고 부른다. 아주 적은 예산으로, 사무소와 초기 멤버들이 각재와 합판을 재단 주문해 직접 지어 2015년 봄 문을 열었다. 물이 새는 지하 안에 지붕 있는 집을 한 채 더 짓고, 창이 없는 지하의 안과 밖을 뒤집어 빛과 공기, 초록을 공간 한가운데의 '식물 코어'에 모았다. 토끼굴은 2025년 열 돌을 맞았고, 그동안 70여 마리의 토끼가 토끼굴을 거쳐 갔다.
이름 토끼굴15 (더래빗홀15, The Rabbit Hole 15) — 토끼굴의 첫 번째 공간
위치 서울 관악구 신림동(대학동) 고시촌, 건물 지하층
용도 공유오피스(코워킹 스페이스) — 개인 책상, 공용 주방, 수경재배 텃밭, 휴식 공간
규모 지하 1개 층, 40평 남짓
설계·시공 별의별건축사사무소(손영민, 박소영) 설계, 초기 멤버들과 셀프 시공(목공·전기·도장 직접, 설비·타일은 전문가)
주요 재료 스프러스 건조 각재, OSB 합판, 아카시아 집성목 상판, 미송 합판 선반, 공구박스, 단프라(플라스틱 보양재) 지붕
개장 2015년 봄
운영 별의별건축사사무소, 연 단위 멤버십
자료 『걷고싶은도시』 84호(2015 가을) 기고글 「초식기업가들의 운명공동공간, 더래빗홀」 (PDF)
설계의 변
비워지는 도시의 지하
신림동 고시촌은 한때 고시생들로 명동처럼 붐비던 동네다. 로스쿨이 생기고 학생들이 빠져나가자 거리는 조용해졌고, 건물마다 지하를 하나씩 차지하던 PC방과 당구장, 고시식당이 문을 닫았다. 많은 지하가 실직자처럼 비어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쇠락이지만, 우리에게 고시촌의 지하는 기회의 빈 곳이었다. 빈 곳이 많아지면 임대료가 낮아지고, 낮은 임대료는 젊은 사람들을 불러 새로운 문화를 만든다. 사무실로서는 손님을 만나기 어려운 동네였지만, 도전할 만한 장소라고 생각했다.
이름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토끼굴에서 따왔다. 무언가 요상하고 신기한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숨겨진 지하 공간이라는 뜻이다. 대기업 중심의 획일화된 경쟁에서 벗어나, 저마다 꿈꾸던 재미있는 '무엇'을 이루려고 이곳에 모여 함께 작당모의를 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토끼들', 또는 '초식기업가'라고 부른다. 더래빗홀은 어딘가 어색하고 부족한 사람들이 만나 친구가 되고, 세상을 함께 여행하는 기분으로 새로운 일을 꾸미는 곳이다. 공통의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조직은 아니지만, 서로 다른 사무소들이 최소한의 비용으로 모여 재능과 아이디어를 나누며 함께 자란다. 우리는 더래빗홀 출신의 사람들이 세상의 즐거운 꽃이 되는 모습을 그려 본다.
성과가 아니라 관계를 위한 공유오피스
사무소를 연 뒤로 우리는 늘 누군가와 함께 일을 벌였다. 왓썹북과는 동네 친구를 만들어 주는 책 『동네북』을 펴냈고, 신림컬쳐랩과는 접는 집 'ZIP하우스'를, 홈카페클래스 휙·왓썹북과는 성북예술창작센터의 교육 프로그램 「우리동네 빠리스타」를 꾸렸다. 더래빗홀을 꾸리던 무렵에는 TKSH사무실과 '최소의 잡지 A4'를, 컨테이너로 만드는 자전거문화 거점 'Biketainer'를 궁리했고, 신림컬쳐랩과는 수경재배 키트 Tokit을, 계림현건축연구소와는 장수의 'Low Cost House 6'를 함께 만들고 있었다. 사람들이 모여 놀면 재미있는 생각이 나고, 역량 있는 사람들이 모이면 일이 굴러간다. 모인 사람의 친구들이 찾아오면 관계는 몇 배로 넓어진다. 우리에게는 계속해서 또 다른 작당모의를 할 장소와 사람이 필요했다.
우리는 협업을 내세우는 공유오피스들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더 좋은 성과를 내려고 사업 파트너를 찾는 모습이 우리에게는 부자연스러웠다. 좋은 아이디어는 관계가 돈독할 때 샘솟는다. 가족처럼 서로에게 아낌없이 베풀 수 있을 때 비로소 신나게 일할 수 있다. 한 공간을 같이 쓰며 산다는 것은 그냥 아는 친구 사이와는 다른 만남이다. 우리는 이곳을 '운명공동공간'이라 불렀다. 운명공동공간은 공생을 말하고, 공생은 가족을 품는다. 그래서 더래빗홀은 아무나와 함께하는 '선택한 공생'이 아니라, 서로를 오래 들여다보고 고른 '선택된 공생'을 지향한다. 멤버를 모을 때 우리는 풀 좋아하는 사람, 정리 좋아하는 사람, 열려 있고 나눌 마음이 있는 사람, 철없지만 개념 있는 사람을 반겼고, 자리에 늘 없는 사람과 시비 좋아하는 '사무실 파이터', 놀 줄 모르는 사람은 꺼렸다. 사실 악하지 않은 사람이면 누구라도 괜찮았다. 멤버는 두 시간 넘는 인터뷰로 서로를 확인하고 들어오며, 서로를 토끼 별명으로 부른다. 이 이상한 곳을 찾아오는 사람은 우리와 비슷한 사람일 것이라는 믿음은 대개 들어맞았고, 2015년 열 명의 멤버가 이 지하에 자리를 잡았다.
40평의 지하는 혼자 쓰기엔 너무 컸다. 혼자 쓰든 여럿이 쓰든 부엌도, 책상도, 조명도 필요하다. 모두가 쓸 만큼 만들어 나누면 비용은 나뉘고 공간은 커진다. 나누면 반이 되는 이 이상한 계산이 더래빗홀의 출발점이다. 그렇다고 더래빗홀을 수익사업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이곳은 같은 시대를 사는 토끼들의 열망이 모인 곳이고, 그들을 모으고 지켜 가며 공생의 가능성을 만들어 가는 곳이다. 멤버십을 한 해 단위로 정한 것도 그래서다. 사람이 자주 바뀌며 관계에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을 줄이고, 서로를 충분히 겪어 볼 시간을 보장하려는 것이다.
비 오는 지하에 지붕 있는 집을 짓다
설계에서 가장 어려웠던 것은 지하 천장에서 언제, 어디서 떨어질지 모르는 물방울이었다. 오래된 건물에서 흔한 일이지만, 아주 적은 예산으로 근본적으로 고치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우리는 지하 안에 지붕이 있는 새로운 집을 짓기로 했다. 공간의 가운데를 써야 하는 사무실 쪽에는 지붕을 얹은 집을, 벽을 써야 하는 다른 쪽에는 지하에 굴을 판 듯한 방들을 두었다.
지붕은 이사 박스로도 쓰이는 플라스틱 보양재, 단프라(1800×900mm, 두께 3mm, 한 장 4,500원)로 덮었다. 비닐봉지만큼 싸면서도 제 몫을 하는 지붕을 찾느라 온갖 아이디어를 쏟아낸 끝에 고른 재료다. 이 지붕은 지금도 제 역할을 잘 해내고 있다.

OSB 합판으로 지은 방 위에 검은 지붕을 얹은 '지하 속의 집'. 안쪽은 따뜻한 조명의 회의 공간이다

'지하 속의 집' 안. 검은 지붕 틀 아래 긴 나무 테이블이 놓이고, OSB 벽을 따라 함께 쓰는 선반과 주방이 이어진다

OSB로 감싼 아늑한 굴 속의 방. 잠시 쉬어 갈 수 있는 침상이 놓여 있다
곱창 뒤집기처럼, 안과 밖을 뒤집다
지하에는 창이 없다. 빛도, 바깥 풍경도, 신선한 공기도 부족하다. 지상의 사무실처럼 창가를 따라 책상을 늘어놓으면 불리한 점만 남는다. 그래서 우리는 곱창 뒤집기처럼 안과 밖의 위치를 뒤집었다. 지상이라면 창밖에 있었을 빛과 초록과 공기를, 지하의 한가운데에 놓인 '식물 코어'로 끌어들인 것이다. 책상은 이 식물 코어를 바라보도록 놓고, 통로는 책상 뒤로 돌아가게 했다.
식물 코어에서는 토마토와 가지, 오이, 고추, 깻잎, 파프리카, 상추와 허브가 자란다. 식물이 내놓는 산소와 사람이 내쉬는 이산화탄소가 오가고, 적당한 습도가 유지되고, 일하다 고개를 들면 초록이 보인다. 키운 채소는 함께 먹고, 때로는 팔기도 한다. 농사짓는 사무실이다. 안과 밖을 뒤집는 이 생각은 훗날 필운동 한옥에서 마당을 집 안으로 들이는 설계로 다시 이어졌다.

위에서 내려다본 식물 코어. 책상들로 둘러싸인 한가운데에서 토마토와 채소들이 자란다

식물 코어를 바라보도록 놓인 책상들. 등 뒤로는 각재 책장이 이어진다
식물을 위한 빛을 함께 쓰다
이 사무실의 조명은 거의 모두 식물을 위한 것이다. 보통의 사무실은 책상을 어디에 두든 대응할 수 있도록 고르게 밝혀야 해서 버려지는 빛이 많다. 더래빗홀은 책상 자리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등기구를 식물이 자라는 가운데와 가장자리에 모았다. 같은 전기로 식물이 자라기에 충분히 밝은 빛을 얻고, 그 빛을 나누어 사람이 일하는 빛으로 쓴다.

각재 선반 아래로 채소가 자라는 통로. 식물을 위한 빛이 바닥과 선반을 함께 밝힌다

무성하게 자란 식물 코어. 각재 틀 안의 수경재배 화분마다 채소와 허브가 우거지고, 그 너머로 책상과 책장이 보인다
사건발생장치
함께 일하는 곳에서 무언가가 생겨나려면 사건이 일어나야 한다. 만나고, 지켜보고, 부딪히고, 엿듣고, 호기심이 생기고, 말을 걸고, 놀고, 웃는 일. 모두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이런 사건이 저절로 일어나도록 공간을 짰다. 동선은 한 바퀴 도는 순환형으로 만들고, 공용 공간과 구석진 방을 섞어 배치했다. 온전히 보이지는 않지만 힐끗 보이고, 보이지 않지만 들리는 거리를 만들었다.
책상은 ㅁ자로 놓았다. 자리마다 조건은 다르지만 장단점이 섞여 있어, 어느 자리도 완벽하게 좋거나 나쁘지 않다. 상석이 없고, 벽을 보거나 홀로 떨어진 자리도 없다. 가운데의 식물 너머로 적당한 거리를 두고 마주 앉아, 서로의 존재를 느끼면서도 안정감을 가질 수 있다.

각재 책장과 선반, 그 아래로 자라는 채소들. 선반 너머로 사무실이 힐끗 보인다

구석에 숨은 작은 휴식 공간. 의자 두 개와 화분, 'Radon Free!!' 안내판
천사의 재료, 각재와 공구박스
모은 돈으로는 공간을 다 채울 수 없었다. 그래서 직접 지었다. 목공과 전기, 도장은 공부해서 우리 손으로 했고, 설비와 타일만 전문가에게 맡겼다. 산 가구가 거의 없으니 목공의 양이 엄청났다. 함께하기로 한 초기 멤버들이 멤버십 비용을 먼저 내어 공사비를 보태고, 날마다 험한 일을 함께 해 주었다. 이 마음씨 좋은 친구들이 없었다면 이곳은 존재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우리에게 희망을 준 재료가 두 가지 있다. 하나는 각재다. 단단한 스프러스 건조 각재 열두 개가 만오천 원 남짓. 쉽게 자르고 붙이고 세울 수 있는 만능 나무로 책상과 책장, 서랍장, 천장, 선반, 벽까지 만들었다. 또 하나는 한 개 2,700원짜리 공구박스다. 튼튼하고, 우리가 좋아하는 회색이고, 서로 맞물려 쌓인다. 책상 서랍과 수납장이 되었고, 크기가 꼭 맞아 수경재배 키트를 만드는 데에도 쓰였다. 이 키트는 훗날 수경재배 키트 'Tokit'으로 이어졌다.

공용 주방의 식료품 선반. 함께 쓰는 살림이 차곡차곡 놓여 있다
여기는 통으로 빌린 커피숍
바쁜 일상이 되풀이되면 생각의 틀은 날마다 조금씩 단단해진다. 그 틀이 굳어 심심해지지 않으려면 새로운 생각에 끊임없이 부딪히고 반응해야 한다. 나와 네가 엇갈리면 다른 누군가가 그 벌어진 사이를 메우고, 그렇게 생긴 차이들이 우리를 풍족하게 한다. 혼자서는 차이를 만들 수 없다. 함께할 사람들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더래빗홀은 하루 스물네 시간 언제든 놀 수 있는 곳이다. 새로 온 멤버에게 우리는 "여기는 통으로 전세 낸 커피숍 같은 곳"이라고 말한다. 공용 공간에서 밥을 먹든, 커피를 마시든, 수다를 떨든, 다트를 던지든 그것은 모두의 권리다. 모두가 주인이고, 서로 기획해서 공간을 바꾸어 간다.
이곳이 어떻게 변해 갈지는 함께하는 사람들에게 달려 있다. 프로그램이 자라면 공간도 바뀌고 성격도 바뀔 것이다. 다만 그 방향이 지루한 기성의 구조는 아닐 것이라 믿었다. 그리고 그 믿음대로, 토끼굴은 사람이 바뀌고 공간이 자라며 10년을 이어 왔다. 2015년의 글에서 우리는 운영의 노하우가 쌓이면 다른 곳에도 제2, 제3의 더래빗홀이 생겨날 수 있으리라고 썼다. 그 말대로 2019년에는 신림동의 또 다른 지하에 두 번째 굴, 토끼굴19를 새로 설계해 지었다. 2025년 열 돌을 맞을 때까지 70여 마리의 토끼가 두 굴을 거쳐 갔다. 토끼굴15에서 시작한 실험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이 글은 손영민 소장이 『걷고싶은도시』 84호(2015 가을, (사)걷고싶은도시만들기시민연대)에 쓴 「초식기업가들의 운명공동공간, 더래빗홀」을 바탕으로 다시 정리한 것이다.




자주 묻는 질문
Q. 토끼굴15(더래빗홀15)는 어떤 곳인가요?
A. 서울 관악구 신림동 고시촌의 지하층에 있는, 여러 작은 사무소와 1인 기업가들이 함께 쓰는 공유오피스 '토끼굴(더래빗홀)'의 첫 번째 공간입니다. 별의별건축사사무소가 설계하고 초기 멤버들과 직접 지어 2015년 봄 문을 열었습니다. 2019년에 새로 설계한 두 번째 공간 토끼굴19와 구별해 문을 연 해를 붙여 부릅니다.
Q. 왜 이름이 '토끼굴'인가요?
A.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토끼굴에서 따왔습니다. 무언가 신기한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숨겨진 지하 공간이라는 뜻을 담았고, 이곳에 모인 사람들을 '토끼들'(초식기업가)이라고 부릅니다.
Q. 창이 없는 지하를 어떻게 쾌적한 사무실로 만들었나요?
A. 창가 대신 공간 한가운데에 수경재배 '식물 코어'를 두고, 책상이 그곳을 바라보도록 배치했습니다. 안과 밖을 뒤집어 빛과 초록과 공기를 가운데로 모은 것입니다. 식물을 위한 조명을 사무실 조명으로 함께 쓰고, 천장에서 물이 새는 문제는 지하 안에 지붕 있는 집을 지어 해결했습니다.
Q. 적은 예산으로 어떻게 지었나요?
A. 목공·전기·도장은 사무소와 멤버들이 직접 하고, 설비와 타일만 전문가에게 맡겼습니다. 값싸고 튼튼한 스프러스 각재와 공구박스로 책상·책장·서랍·천장을 만들었고, 지붕은 플라스틱 보양재(단프라)로 덮었습니다. 초기 멤버들이 멤버십 비용을 미리 내어 공사비를 마련했습니다.
Q. '사건발생장치'란 무엇인가요?
A. 함께 일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만남과 대화, 호기심 같은 '사건'이 저절로 일어나도록 고안한 공간 장치입니다. 더래빗홀에서는 순환형 동선, 공용 공간과 구석방의 혼합, 힐끗 보이는 거리, 상석이 없는 ㅁ자 책상 배치가 그 역할을 합니다.
서울 관악구 신림동의 건축사사무소 — 주택·한옥·다가구 신축, 풀빌라 펜션·상업시설 설계, 상업공간 인테리어, 공유주택 기획·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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