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TIME IN THE DARK EXHIBITION

깜깜한 낮 - 전시



읽지 못하는 책
청주에 어떤 도서관에는 읽을 수 없는 책들이 가득 있다. 꽤 두꺼운 양장본의 책들은 하얀 종이로만 만들어져 있다. 누군가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글씨. 그 흰 종이 위를 한줄 한줄 쓰다듬으며 마술처럼 읽어내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 중에 한권을 골라 읽어 주기를 요청한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글씨는 소리가 된다.

'깜깜한 낮'은 작품을 읽어주는 전시이다. 전시에서는 이미지에서 텍스트로 전환된 내용을 점자로 제작해 읽어주고 수화 통역을 영상으로 보여 준다.

전시에 소개 되는 5개의 작업은 평면, 입체, 공간으로 구분할 수 있다. 전시에 참여하는 구성원들은 회화, 입체조형, 설치, 건축 등의 작업을 하고 있다. 정혜숙의 '어항'은 평면회화에 세라믹오브제를 부착한 부조작업, 손진희의 'Kit01'은 송풍기로 유입되는 공기에 의해 움직이는 입체조각, 김영현의 '진화한 상상'은 작가에 의해 발췌된 한국전통건축구조와 서양의 양식을 재조합한 세라믹입체조각, 손영민의 '보이지 않는 도시의 방들'은 존재하지 않는 작가의 상상 속 공간을 이탈로 칼비노의 '보이지 않는 도시들'을 차용해 설명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박소영의 '안락동 미화가구'는 건축가 자신이 유년기에 살았던 기억 속에 존재하는 공간을 묘사한다.












안락동 미화가구
박소영

그 집, 아니 그 가구점은 시장과 주거지가 만나는 경계에 있었다. 가구점의 전면은 얇은 유리를 끼운 미닫이문으로 되어 있어 진열된 가구들이 밖에서도 보였다. 이 문을 열고 가게로 들어설 때면 알루미늄 샷시의 마찰음과 함께 미닫이문은 덜컹거리는 소리를 내어 사람이 드나드는 것을 알렸다. 가게의 첫번째 공간은 전면의 길이에 비해 깊이가 절반쯤으로 낮았지만 천장이 높아 답답하지는 않았다. 이 곳에는 비좁을 정도의 나전칠기가구들이 유리문을 향해 전시되어 있었고 해가 지면 노란 백열등이 켜지면서 문갑이며 화장대에 장식된 자개문양들이 먼지하나 없이 매끈한 칠기의 표면에서 빛났다.

그 공간의 왼쪽으로 이어지는 두번째 공간은 첫번째 공간과 크기는 비슷하였지만 주로 덩치가 큰 장롱이나 장식장이 벽을 등지고 열을 지어 있었다. 이어지는 그 다음 공간 역시 어둠 속 장롱들이 조용히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1층이었지만 사방의 창을 막아 지하처럼 차가운 공기에 새로 칠한 칠기의 냄새가 어지럽게 녹아 있었다. 그 공간은 가장 어두워 나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 세 번째 방의 구석에 있던 아빠의 노란 작업공간 그 비좁은 방에서 아빠와 함께 있는 것을 좋아했다.

살림공간은 첫번째 공간에서 이어져 있었는데 작은 유리가 끼워진 문을 열면 통로처럼 좁고 어두운 부엌이 있었다. 부엌에 들어서자마자 오른쪽으로 툇마루같은 단이 있었는데 그 단을 올라서면 안방이 있었다. 안방의 뒷편 미닫이 문 너머에는 옷장과 책장, 책상이 있는 건너방이었다. 이 방은 언니와 내가 자는 곳이었지만 안방과 사이에 있는 문을 주로 열어두었기 때문에 우리는 건너방에서 올라갈 수 있는 다락에 주로 숨어 있었다. 다락은 언니가 키가 커져서 머리가 닿기 전까지 우리가 서기에 충분할 높이였다. 사닥다리를 타고 올라가야 하는 그 작은 방을 하루에 백번씩 드나들었다. *언니에게 칭얼대고 라디오 주파수를 맞춰 언니가 좋아하던 노래를 듣거나 다락에서 골목으로 난 창문을 통해 바깥을 감시했다.

끝도 없는 기억처럼 이어지던 이 집 안에서 공간은 공간으로 이어지고 구석은 구석과 만나 무한한 은신처를 만들어냈다. 공간들은 아파트처럼 납작 평평하지도 않았고 크고 작으며 높고 낮아 퍼즐처럼 얽혀 있었다. 이 안락동 미화가구는 우리 가족이 이사를 하면서 그 물리적 실체를 잃어버린 채 기억 속에만 존재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집은 내가 볼 수 있는 그 어떤 집보다 많은 이야기를 가지고 있으며 내가 지금 둘러싸인 공간만큼이나 나에게 영향을 주고 있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보이지 않는 도시의 방들
손영민

*방은 기억, 욕망, 기호 등 수많은 것들의 총체이다. 당신의 방에 대한 생각은 계속 형태를 취했다가 사라지는 부정형(不定形)의 공간 속에 숨겨진, 강렬한 공간에 대한 이미지 위에 펼쳐진다.

당신의 양팔 너비는 당신의 키와 같다.
한쪽 어깨로부터 주먹 쥔 한쪽 팔을 뻗은 길이 대략 1미터.
주먹 쥐고 양팔을 앞으로 나란히 했을 때, 가슴으로부터 주먹까지의 거리 대략 50센티미터.
손을 쫙 편 길이 대략 20센티미터.

도시의 방들.
당신은 어떤 방을 상상하는가.

색이 보이지 않는, 하늘도 주변도 끝없이 무결한 공간에 당신이 서있다.
당신의 바로 앞.
가로 3미터, 높이 2.3미터의 면이 생겨난다.
그리고 당신의 허리 춤, 아래서 80센티미터 위부터 위에서 20센티미터 아래까지, 당신 팔 넓이 너비 창이 생겨난다.

이제 당신은 뒤로 걷기 시작한다.
앞에 있던 벽의 좌우 끝 선들로부터 면이 생겨나고, 당신이 움직임을 따라 뒤로 확장되어간다. 그렇게 당신은 3미터 뒤로 간다.
좌우에 길이 3미터, 높이 2.3미터의 면이 생겨났다.
제자리에서 뒤를 돈다.

좌 우의 벽 이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무결한 공간이 펼쳐져 있다.
잠시 한걸음 뒤로 물러선다.
좌우 벽에 맞춰 가로 3미터 높이 2.3미터의 면이 생겨난다.
오른쪽으로부터 10센티미터 떨어진 곳에, 가로 90센티미터 높이 2미터의 네모난 문이 있다.
문의 왼쪽 끝으로부터 20센티미터 옆, 당신의 심장 높이에 스위치가 있다.
그 아래로 당신의 무릎 높이에 2구짜리 콘센트가 있다.

하늘을 올려다 본다.
사면이 막힌 곳 위로 거리를 알 수 없는 공간이 있다.
네면의 모서리를 메꾸는 가로, 세로 3미터의 면이 생겨난다.
그 가운데에 당신 팔길이의 크기를 갖는 등이 달려있다.

이제 당신은 그 방안을 돌아다니며 방의 구석구석을 구경한다. 6섯개의 면을 차례로 들여다 본다.

누구의 방인가. 당신은 어떤 방을 상상하는가.
어떤 빛을 상상하는가.
무슨 색을 상상하는가.
어떤 질감들을 상상하는가.
어떤 모양들이 보이는가.
창문 너머에 무엇을 상상하는가.

무결한 공간에 무결한 색은 아무런 것도 담고 있지 않다.
당신이 상상한 것이 있다면 그것이 당신이 생각하는 방의 모습이다.

*보이지 않는 도시들-이탈로 칼비노 P211 차용



협력 : 무지개도서관, 충북농아협회, 최금단(수화퍼포먼스), 이수희(점자퍼포먼스)
출처 : 네오룩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2014.11.20. –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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