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ABBIT HOLE 15

더래빗홀 - 초식기업가들의 운명공동공간

이 글은 (사)걷고싶은도시만들기시민연대에서 발간하는 계간지 <걷고싶은도시> 2015년 가을 제84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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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굴이란 뜻의 ‘더래빗홀(THE RABBIT HOLE)’은 어딘가 어색하고 부족한 사람들이 만나 친구가 되고, 세상을 같이 여행하는 기분으로 다양하고 새로운 일들을 꾸미는 곳으로서, 최소한의 비용으로 서로 다른 사무소들이 모여 재능과 아이디어를 나누고 성장해가는 장소이다. 공통의 목적과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조직은 아니지만, 우연과 마음이 운명처럼 작용하여 만들어내는 신선한 에너지는 온 세상을 재미있게 변화시킬 것이다. 더래빗홀 출신의 사람들이 세상의 즐거운 꽃이 되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공간의 이름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토끼굴에서 착안하였는데, 무엇인가 요상하고 신기한 일들이 일어날 것만 같은 미지의 숨겨진 지하공간이라는 점을 은유하고 있다. 대기업 중심의 획일화된 경쟁사회에서 벗어나 자신이 꿈꿔오던 재미있는 ‘무엇’을 성취하기 위해 하나 둘 이곳으로 모여들어, 함께 작당모의를 하고 있는 사람들을 토끼들(=초식기업가들)이라고 부른다.

@ 작업 공간을 왜, 그리고 어떻게 공유할까?

작당모의
처음 사무실을 시작하면서부터 다양한 콜라보레이션(collaboration, 공동작업)들을 하게 되었다. 나에겐 하고 싶은 일들이 참 많았고, 이것들이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유기적으로 잘 엮여서 새롭고 또 재미있는 일들로 연장되었다. ‘왓썹북’과 함께 동네친구를 만들어 주는 ‘동네북’을 출판하였고, ‘신림컬쳐랩’과는 접는 ‘ZIP하우스2’를, ‘홈카페클래스 휙’과 ‘왓썹북’과는 성북예술창작센터 교육프로그램인 ‘우리동네 빠리스타’를 진행하였다. 지금은 ‘TKSH사무실’과 함께 ‘최소의 잡지 A4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며, 컨테이너로 만드는 자전거문화 거점 프로젝트인 ‘Biketainer’도 진행하고 있다. 또한, ‘신림컬쳐랩’의 남동수씨와 수경재배키트인 ‘Tokit’를 만들고 있고, ‘계림현 건축연구소’와는 'Low Cost House 6'를 함께 설계하고 있다.

사람들이 모여서 놀면 재미있는 것들이 생각나고, 역량이 있는 사람들이 모이면 추진이 된다. 모인 사람들의 친구들이 방문하면 그 관계는 몇 배로 확장되고 더 많은 이야기들이 생성된다. 능력도 생각도 관심사도 다른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놀다보면 당연하게도 시너지가 생기지 않을까. 나에겐 계속해서 또 다른 작당모의를 할 장소와 사람이 필요했다.


새로운 가족
콜라보레이션을 한다는 기존의 ‘셰어오피스(share office)’들을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보았다. 오로지 더 좋은 성과를 만들기 위해 새로운 사업파트너를 찾는 것처럼 보이는 대다수 셰어오피스들의 모습이 나에게는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콜라보레이션이라는 명목으로 함께 사업을 진행하기에 앞서, 애정이 충만한 소통이 이루어지고 관계가 돈독할 때에 더 많은 이야기와 재미난 아이디어들이 샘솟는다. 관계가 불편한 사람, 혹은 애정이 없는 사람과 함께 아이디어를 토론할 수는 있을지언정, 그러한 관계에서 만들어진 생각들이 지속적으로 더욱 큰 가치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마치 가족처럼 서로에게 아깝지 않게 베풀 수 있는 관계가 되어 배려하고 서로를 향한 긍정의 에너지를 나눌 때, 비로소 소통의 산물로서의 생각들이 오가고 신나게 일할 수 있게 된다. 같이 산다는 것은 그냥 아는 친구와는 다른 성격의 만남이다. ‘운명공동공간’이란 공생을 말하고 이것은 가족의 개념을 내포한다. 즉, 어디에서나 할 수 있는 ‘선택한 공생’이 아닌 좀 더 적극적인 의미의 ‘선택된 공생’을 지향하고자 한다. 그러기에 더래빗홀에서 만들어 나가는 여행은 새로운 개념의 가족의 생성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나름의 조건들을 내세웠다.

● 대상 : 집에서 혼자 일하면 진전이 없는 사람, 살아남기 노하우를 공유하고 싶은 사람, 즐거운 사람과 함께하고 싶은 사람, 무섭지 않고 무난한 사람
● 선호하는 사람 : 풀 좋아하는 사람, 정리 좋아하는 사람, 다양한 직군의 사람, 열려있고 나눔의 의지가 있는 사람, 철없고 개념이 있는 사람
● 꺼리는 사람 : 사무실 자리에 항상 없는 사람, 사무실 파이터(시비 좋아하는 사람), 배려심 없는 사람, 관계 맺기가 싫은 사람, 놀 줄 모르는 사람

사실 악하지 않은 사람이면 누구라도 괜찮았다. 다만 우리의 취지를 충분히 공감할 수 있고, 그것을 함께 해 나갈 사람이면 족했다. 최소 2시간 이상의 인터뷰 시간을 통해 사연을 듣고, 서로를 충분히 확인하고, 의지를 엿보고 선택했다. 결국 사람은 인연이라고 했던가. 의지가 있는 사람들은 모두 괜찮았고, 맞지 않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인터뷰 이후 자진해서 오지 않았다. ‘이 이상한 곳에 찾아오는 사람은 우리와 비슷한 사람일 것이다.’ 라는 믿음이 적중했던 것 같다.

이런 과정을 거쳐, 총 열 명의 멤버들이 한 공간에 자리 잡게 되었다. 아직 모두의 캐릭터가 완전히 잡히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서로 닉네임을 붙이고 토끼피디아(위키피디아 인물의 토끼굴 버전)를 통해 서로를 타인의 시선으로 관찰하고 업데이트 해나갈 것이다.

● 별토끼(손영민), 집토끼(박소영) : 별의별사무소 - 건축설계, 인테리어, 도시농업, 예술, 교육, 출판
● 플토끼(유충렬) : 모노카이 - 웹 에이전시, 웹 프로그래머
● 똥토끼(남동수) : 신림컬쳐랩 - 문화기획, 공공미술, 커피연구, 교육 및 각종 용역
● 삼토끼(박은정, 유민정, 이혜영) : 프로젝트인 - 의류, 입을 수 있는 예술
● 맛토끼(이정경) : 자동차 패턴 디자이너, 영화미술
● 복토끼(김선희) : 출판 편집, 재테크, 공인중개사, 조리사, 뜨개질
● 옥토끼(박계정) : 계림현건축연구소 - 건축, 조경, 교육
● 뻔토끼(오승환) : 왓썹북 - 1인 출판사, 마을활동가

나누면 반이 되는
주어진 40평 남짓의 커다란 지하는 혼자 사용하기엔 너무 컸다. 혼자 사용하든 여럿이 사용하든 부엌도 필요하고, 책상도 필요하고, 조명도 필요하고, 에어컨도 필요하다. 공간도 에너지도 시설도 혼자 쓰면 낭비다. 우리가 필요한건 남들도 필요할 테니 모두가 쓸 수 있을 만큼 만들어 나누어 쓰면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이상한 계산이 나온다. 당연하게도 내가 지출할 금액을 남들이 나눠서 지출해주니 그 만큼만 남들이 부담해주면 나도 이득이고 남도 이득이다.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내는 셈이다. 그래서 더래빗홀 운영은 단순히 수익사업의 측면에서 설명하기는 힘들다. 이곳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토끼들의 열망의 집합이며, 이들을 모으고 지켜가는 노력을 통해 공생의 가능성을 만들어 가는 곳이기도 하다.
현재 더래빗홀은 120만원의 연 단위 멤버십으로 운영되고 있다. 연 단위 멤버십은 관계를 위해 서로에게 에너지를 쓰는 소비적인 상황을 줄이고, 서로를 충분히 겪어나갈 수 있는 기간을 보장하기 위한 방법이다. 또한 예산 마련을 위해서라도 필요한 장치였다. 비용은 예상 공사비를 마련하기 위해 1/n한 액수를 우선 입주비로 책정하였다. 이 금액은 원금상환기간 2년을 목표로 사무실 인테리어 및 각종 시설비와 앞으로 발생할 수리비용까지 충당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금액이다.

차이가 만들어내는 새로운 차원들
‘어떻게 하면 심심한 상태가 될 수 있을지’가 바쁘게 살아가는 요즘 사람들의 고민이라면, 나는 바쁜 일상이 지속되고 반복되는 상황을 심심하다고 느꼈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매일 견고해져가는 생각의 틀의 경계를 조금 더 확장시키고 그 틀이 단단해져가는 시간을 유예시킬 수 있을까. 걸어온 삶을 되돌아보니 고착됨을 반복하는 나의 틀이 심심하게 머물지 않으려면, 새로운 생각들에 끊임없이 노출되고 반응하며 부유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나와 네가 엇갈리면 그와 저 사람이 벌어진 사이를 메우고, 그런 벌어지고 일그러지는 사건들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차원들에 의해 우리의 기운이 풍족해진다. 그리고 심심하지 않다.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고, 움직이고, 보여지고, 숨을 쉬는 모든 것이 그렇다. 혼자서는 차이를 만들 수 없다. 이 모든 건 함께할 사람들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더래빗홀은 기본적으로 24시간 언제든지 놀 수 있는 곳이다. 우리는 새로운 멤버에게 ‘여기는 통으로 전세 낸 커피숍 같은 곳’이라고 이야기 한다. 노는 관계는 새로운 이야기가 생성될 수 있는 조건이기도 하기 때문에 공용공간에서 밥을 먹든, 커피를 마시든, 수다를 떨든, 다트를 던지든 그것은 그들에게 기본적으로 주어진 권리이다. 모두가 주인이고 서로가 기획해서 공간을 변화시켜 나가고 재미있는 프로젝트를 기획해 낼 수도 있다.



@ 하필이면, 신림동 고시촌에 사무실을?

오지의 명동
신림동 고시촌을 처음 방문한 사람들은 이런 곳이 있는 줄 몰랐다며 한결같이 놀란다. 조용할 것 같은 동네에 버스를 타고 들어오면 수많은 고시생들이 인파를 이루어 흡사 명동 거리처럼 발 디딜 틈 없는 풍경을 연출하고, 밤새 이어지는 유흥이 동이 트고 나서야 조용히 사라지는 신세계를 경험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로스쿨의 등장과 함께 많은 학생들이 빠져나가고, 한 때 번성했던 이 동네는 서서히 조용해져 가고 있다. 혹자는 쇠락으로, 누군가는 희망으로 말하는 이곳은 여전히 특별하고 신기한 기운의 도시다.

고시촌의 지하들
거리를 가득 메우던 고시생들의 수가 급격하게 줄어듦과 동시에 동네의 상권이 하나 둘 무너지기 시작했다. 빈 방이 남아돌고, 가게가 비워져 간다. 피씨방 때문에 오락실이 사라지고, 핸드폰 게임과 콘솔 게임의 영향으로 온 동네 지하를 점령하던 피씨방이 죽었다. 당구장은 이미 추억의 스포츠가 되었고 건물 지하마다 하나씩 있었던 피씨방과 당구장, 고시식당이 사라졌다. 많은 지하들이 비워지고 실직자처럼 방치되어 있다. 건물 값 떨어질까 아무 말 없지만 젊은이들에게 고시촌의 지하는 기회의 빈 곳이다.

비워지는 도시의 가능성
어떤 장소에 사람들이 빠져나가 유휴공간이 증가하면 그 주변의 임대료가 낮아진다. 빈 곳이 많고 임대료가 낮아지면 자연스럽게 젊은이들이 유입이 되고, 그들은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내는 원동력이 된다. 신림동의 지하는 오래 비워져 왔고, 이제 젊은이들이 하나 둘 몰려들기 시작하고 있다. 최근에는 고시촌 한 가운데에 소극장이 생겼다. 상상할 수 없었던 일들이 여기, 이 빈 곳 많은 도시에서 일어나고 있다. 더래빗홀도 그 중심에서 어떤 신나는 에너지를 만들어낼 수 있을지 모르는 일이다. 사무실로서는 접근성이 떨어지고 클라이언트를 만나기 어려울 것 같은 동네이지만, 이러한 가능성들은 우리가 충분히 도전할 만한 장소라고 여기게 만들었다.



@ 조건의 한계 속에서, 어떻게 만족할만한 공간을 설계할 것인가?

코딱지 만한 예산
여러 사람이 쓸 수 있는 사무실을 꾸리기에 우리가 가진 자금은 턱없이 부족했다. 적정 금액을 산출하기 위해 예상 공사비와 감가상각비, 공간임대료 및 인건비, 관리비 및 수익을 놓고 며칠을 계산기를 두드렸다. 멤버십 비용을 높게 측정하기에는 이 동네의 입지 조건이 그다지 좋지 않았기에 원하는 만큼의 예산을 확보하기는 어려웠다. 따라서 극도로 최소화한 비용으로 공사를 해야 했고, 함께하고자 뜻을 건넨 신림컬쳐랩의 남동수씨와 계림현 건축연구소의 박계정 소장이 공사비 마련을 위해 멤버십 비용을 선금으로 지불해 주었다. 덕분에 우리가 모은 금액으로 어느 정도 공사를 할 수 있었고, 추후 다른 멤버를 모집한 금액으로 모자란 공사비를 메우고 추가 공사 및 물품 구입을 진행하기로 했다.

젊으니까 노동력?
어렵사리 모은 금액이었지만 공간을 채우기엔 역부족이었기에, 우리는 공사비를 줄이기 위해 셀프인테리어를 하기로 했다. 목공사, 전기공사 및 도장공사는 공부를 하여 자체적으로 해결했고, 설비와 타일은 전문가에게 의뢰했다. 구매한 가구가 거의 없기에 목공사 양이 엄청났다. 다행이도 초기 멤버인 남동수씨와 박계정 소장이 각종 험한 일들을 매일같이 도와주었다. 이 마음씨 좋은 친구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곳은 존재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천사의 재료, 각재와 공구박스
우리에게 희망을 준 두 가지 주요 재료가 있다. 각재와 공구박스. 각재만 있으면 우리는 집도 지을 수 있다. 개중에 단단한 스프러스 AA급 건조 각재(27mmX27mmX3600mm)는 12개에 15,500원! 우리가 쓸 수 있는 가장 저렴하면서도 튼튼한 나무재료였고 쉽게 자르고 붙이고 구조를 세울 수 있는 그야말로 만능나무였다. 책상, 책장, 서랍장, 천장, 선반, 침대, 벽 등 이 모든 것은 이 사랑스런 각재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각재에 버금가는 천사 재료가 또 있다면 그 녀석은 공구박스 1호. 한 개에 단돈 2,700원임에도 구조적으로도 훌륭하고 아름다우며 우리가 선호하는 회색에 서로 조합이 가능했다. 4칸짜리 서랍 하나가 만원이 조금 넘는 금액인 것이다. 게다가 수경재배용으로도 완벽한 크기여서, 책상서랍과 각종 수납장뿐만 아니라 수경재배키트를 만드는 데에도 크게 공헌하였다.



비오는 지하
더래빗홀 설계에서 가장 어려운 점이 있었다면, 그건 지하 천장에서 불규칙하게 떨어지는 물방울의 해결이었다. 언제, 어디서 떨어질지 모르는 물은 오래된 건물에서 으레 발생하는 문제이고, 이것의 근본적인 해결도 어렵지만 매우 적은 예산으로 대처하기가 무척이나 곤란한 일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지하 안에 지붕이 있는 새로운 집을 만들기로 했다. 공간의 가운데를 써야 되는 사무실 쪽은 지붕 있는 집을, 벽을 사용해야 하는 다른 쪽에는 지하에 굴을 판 형태로 설계해야 했다. 지붕 덕분에 더 많은 자재가 필요했고 그 비용을 줄이기 위해 비닐봉지만큼 세상에서 가장 저렴한 지붕을 올리기 위해 갖가지 번뜩이는 아이디어들을 쏟아내 봤지만 무엇을 쓰든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결국 우리는 1800x900x3T 크기의 단프라(플라스틱 보양재. 이사박스로 쓰이기도 하며, 장당 4,500원이다.)를 사용해 지붕을 올렸고 자기 역할을 잘 해내고 있다.


지하와 식물, 농사짓는 사무실
지하의 조건은 지상과 다르다. 지상과 같은 조건의 배치는 불리한 점이 많다. 지하는 창이 없어서, 빛과 적절한 어메니티 및 조망, 신선한 공기와 같은 기본적인 물리적 조건이 부족하다. 이러한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곱창 뒤집기처럼 내부와 외부의 위치를 뒤집기로 하였다. 따라서 외부의 신선한 공기, 어메니티, 빛은 지상과는 다르게 지하의 가운데 배치된 식물코어를 통해 충족된다. 식물코어를 바라보는 책상 배열과 뒤로 이어지는 통로는 외부를 기대하기 힘든 지하의 불리함을 새로운 개념으로 극복할 수 있게 한다. 또한, 이러한 배치는 식물에서 생성되는 산소와 사람이 생성하는 이산화탄소의 교환, 식물을 키우기 위한 조명의 공유, 적절한 습도의 유지, 세로토닌 분비, 심리적 건강함 등 식물과 공생할 수 있는 많은 요소들을 얻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곳에서 키워지는 대부분의 식물들은 먹을 수 있는 농산물이다. 토마토, 가지, 오이, 고추, 깻잎, 파프리카, 치커리, 로메인, 각종 허브류 등이 재배되고 있고, 이 작물들은 우리의 건강한 식단을 책임지기도 하고 판매를 하기도 하며 사무실의 신선한 어메니티를 조성하는 일등 공신이기도 하다.



조명
사무실에서 사용되는 거의 모든 조명은 식물을 위한 조명이다. 일반적인 오피스는 다양한 책상 배치에 대응하기 위해 균질한 조도가 필요하기 때문에 낭비되는 조명이 많다. 더래빗홀은 책상의 위치가 고정되어있기에 등기구를 식물을 키우기 위한 가운데와 외각으로 집중 배치할 수 있었다. 그래서 같은 소비전력으로 식물 생장에 필요한 충분히 밝은 빛을 얻을 수 있었고, 그 빛을 공유하여 사무실 조명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설계하였다.

사건발생장치
함께 일하는 곳에서 시너지가 생기기 위한 조건은 바로 다양하게 고안된 사건발생장치이다. 만나고, 지켜보고, 부딪히고, 이야기하고, 엿듣고, 호기심이 생기고, 말 걸고, 놀고, 웃고 하는 등의 모든 것이 사건이고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들이다. 이를 위해 순환식 동선을 만들고, 공용공간과 구석진 공간을 섞어 배치하였고, 온전히 보이지는 않지만 힐끗 보이게 만들고, 무엇을 하는지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거리를 만들고, 어느 자리하나 상석이 없는 책상 배치를 하였다. 보이지 않지만 들리고, 들리지 않지만 보이는 공간들. 이렇게 아기자기하게 계획된 공간은 서로의 관계를 만들고 사건을 발생시키기에 최적의 세팅이 아닐까 싶다. 특히 ㅁ자로 된 책상의 배치는 각각의 자리 조건이 다르지만 장단점이 섞여 어느 자리하나 완벽하게 좋거나 나쁘지 않도록 동선을 만들었다. 벽을 바라보거나 고립된 자리도 없고, 가운데 있는 식물을 통해 적절한 거리를 두고 앉아 마주보는 시선을 교환할 수 있도록 하여 서로의 존재를 교감할 수 있는 동시에 안정감 또한 느낄 수 있도록 하였다.




@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

우리는 더래빗홀 사람들이 이곳에서 다양한 실험과 도전으로 세상에 나아갈 수 있는 기반을 만들고 돈독한 관계를 확장시켜 커뮤니티를 형성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자신의 역할을 찾고 꿈을 실현시켜 밖으로 진출하여, ‘나는 더래빗홀 출신’이라는 말을 당당히 할 수 있다면 얼마나 근사한 일인가.

더래빗홀이 앞으로 어떻게 변모해 나갈지는 함께하고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 논의, 변화에 달렸다고 생각한다. 이곳은 한두 사람의 결정과 가치관으로 유지되는 곳이 아니다. 나의 생각이 온전한 나의 생각이 아니듯 우리는 서로에게 영향을 받으면서 새로운 논의를 생성해 나갈 것이다. 프로그램이 발전하고, 새로운 프로젝트가 생겨남에 따라 그에 맞추어 공간도 변모해 나갈 것이고 성격도 변화해 갈 것이다. 하지만 그 방향이 결코 지루한 기성의 구조는 아닐 것이라 믿는다. 멋진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또 다르게 이 장소를 누릴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곳이 아닌 또 다른 곳에서의 더래빗홀도 꿈꾸고 있다. 우리가 공간을 기획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부분이 수익성이었다. 임대비용과 자재비와 인건비, 유지비용 및 감가상각을 고려해 합리적인 비용구조가 마련되지 않으면 이런 장소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현재 책정된 비용도 실험적인 비용으로서, 운영과정을 통해 재조정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차후 이런 운영 노하우를 통해 합리적인 비용과 견고한 프로그램을 제시한다면 이 장소를 시작으로 다른 많은 곳에 제2, 제3의 더래빗홀이 생겨날 수 있을 것이고, 그 시너지는 대단할 것이라 생각한다. 도처에 이곳과 같은 장소를 희망하는 사람들이 가득하기에 서로에게 윈-윈(win-win)이 되는 구조를 확장시키는 일은 모두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충분히 값어치 있는 일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걷고싶은 도시> 2015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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