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굴 이야기
옛날옛적 숲속에 온갖 동물들이 모여 살고 있었다. 이 중 호랑이에게는 걱정이 있었다. 숲속의 왕이라는 별명을 가진 호랑이지만 사냥을 다니다 실패해 굶는 날이 많았고 자칫하다가 다른 맹수들에게 잡아먹힐지도 몰라 늘 불안해했다. 이런 호랑이에게 어느 날 묘수가 떠올랐다. 호랑이가 보기에 토끼들은 겁이 많고 약하여 부려먹다가 잡아먹기에 좋아보였는데 이 토끼들을 모아다가 목장을 만드는 것이었다. 신선한 토끼풀을 마음 놓고 뜯어먹을 수 있는 넓은 목장은 토끼들에게 낙원처럼 여겨졌다. 호랑이의 보호 아래에서는 독수리도 들개도 두렵지 않았다. 호랑이의 꾐에 넘어간 겁쟁이 토끼들은 너도나도 호랑이의 목장에 가고 싶어했다.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목장에 들어간 토끼들은 신이나 토끼풀 잔치를 열며 열심히 먹어댔다. 호랑이의 보호가 왠지 살벌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눈 앞의 토끼풀 맛을 이제와서 버릴 수는 없었다. 살이 오른 토끼들은 금방 토끼같은 새끼들을 낳았다. 금방 불어난 토끼수에 곧 토끼풀이 모자라게 되었다. 이때 호랑이가 슬픈 표정으로 말했다. 아기토끼들을 먹일 풀이 모자라니 나이가 많은 토끼 순서로 잡아먹어야겠노라고. 엄마 토끼는 사색이 되어 벌벌 떨며 살려달라고 했다. 호랑이가 말했다. 네가 우리 목장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이미 들개의 이빨에 죽었을지도 모르니 살아있는 동안 행복했던 것을 감사해야 한다고.
엄마토끼가 사라지고 목장은 표면적으로 안정을 찾았다. 모자라는 토끼풀 문제는 서로서로 먹는 양을 줄이기도 하고 토끼풀 생산성향상을 위한 신기술 개발을 통해 해결해나갔다. 예전만큼 살이 오르지는 않았지만 산속을 헤매는 것보다는 나은 삶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호랑이가 슬픈 표정을 지으며 배가 너무 고파서 넓은 목장을 모두 지킬 수 없게 되었다고 말했다. 목장의 규모를 절반으로 줄이기로 했다고 하며 슬프지만 토끼들을 위한 결정이니 이해해달라고 하였다. 좁아질 목장을 걱정하던 엄마토끼 몇마리는 자청하여 호랑이의 먹이가 되기로 하였다. 아기토끼들을 지켜주는 호랑이가 굶게 되면 목장의 토끼 모두에게 위기가 닥치리라는 생각이었다.
엄마토끼들의 희생으로 토끼들도 당분간 먹고 사는 것에 문제가 없어졌다. 배가 부른 호랑이는 더 열심히 일해 목장의 규모를 예전처럼 키웠다. 토끼들도 토끼풀을 키우는 데에 더 힘을 냈다. 이후로도 호랑이는 목장의 규모를 주기적으로 키웠다가 줄여가며 토끼들을 잡아먹었다. 수시로 배가 고프다고 말하는 호랑이는 점점 더 커져만 갔고 점점 더 많은 토끼를 먹어야 했다.
얼룩이는 목장에서 태어난 토끼였다. 호랑이를 닮은 얼룩무늬덕에 다른 토끼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다. 토끼들 사이에서는 얼룩이의 아빠가 호랑이이기 때문에 결코 잡아먹히지 않으리라는 헛소문도 떠돌았다. 얼룩이도 가끔 자신이 호랑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런 얼룩이에게 목장은 너무나 답답한 곳이었다. 호랑이가 나타나면 토끼들은 모두 겁을 먹고 머리를 조아렸고 얼룩이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호랑이를 두려워하지 않는 유일한 토끼였던 얼룩이는 호랑이의 눈에 이내 거슬리게 되었다.
바깥 세상이 궁금하던 얼룩이는 호랑이에게 찾아가 목장 밖에 나가서 놀고 싶다고 말했다. 얼룩이가 평소에도 마음에 들지 않던 호랑이는 송곳니를 드러내며 얼룩이에게 겁을 주었다. 호랑이의 송곳니를 처음 본 얼룩이는 자신은 결코 호랑이가 아니며 자신 역시 호랑이의 먹잇감이 될 운명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왜 다른 토끼들이 호랑이를 예찬하면서도 바들바들 떨었는 지 알게 되었다.
다른 토끼들과 달리 겁이 없던 얼룩이는 호랑이가 낮잠을 자는 틈을 타서 목장에서 달아나기로 했다. 목장에서 한가로이 지내며 달리는 법을 배우지 못했던 얼룩이지만 죽을 힘을 다해 달리면서 깨어나는 질주본능에 감탄하며 토끼로서의 자부심과 자유로움을 얻게 되었다.
며칠을 두려움과 자유로움 속에서 숲속을 헤매던 얼룩이는 나무뿌리아래 작은 구멍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구멍은 목장 밖의 토끼들의 마을로 이어져 있었다. 그 곳에서 만난 토끼들은 목장안의 토끼들과 달랐다. 목장의 토끼들보다 날쌘 다리를 가졌으며 무엇보다도 모두들 보석같은 눈에 희망을 담고 있었다.
토끼굴의 토끼들은 호랑이 목장의 토끼들을 하나같이 안타까워했지만 그들 역시 배가 고프기는 마찬가지였다. 이 때 얼룩이가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 목장에서는 모자라는 토끼풀을 충당하기 위해 농사를 지었던 것이다. 구석기시대에 머물러 있던 토끼굴에 혁명적인 변화가 일었다. 토끼들은 굴 속에 토끼풀 농장을 만들기로 했다. 필요한 식량을 자급자족하며 남는 식량은 주변의 사슴과 새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얼룩이는 처음으로 토끼로 태어난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그 이후로도 토끼굴의 토끼들은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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